적의 화장법

적의 화장법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녀는 내 천생연분인 것 같다. 그녀에게 정말이지 잘해주고 싶다. 그런 그녀를 놔두면서 바람을 피는 그의 속내는 무엇일가? 물론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며 늘 후회하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종교와도 같다. 의심없는 무조건 적인 믿음. 처음과 같은 한결같음으로 사랑한다는 믿음. 그럴 수 있다는 믿음. 그런 그에게 바람이란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막을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유혹일 것이다. 그래서 더 괴로운지도…. 냉정한 현실은 이렇다. 온전히 사랑하는 데 다른 여자에게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끌릴리는 없다. 그건 그의 사랑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도 감정일 뿐이다. 영원히 한결 같은 감정은 없다. 그 안의 적은 어쩌면 이렇듯 명징하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내부의 적의 말을 도통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괴롭…(생략)

살아나서 괴롭힐 때도 있지만 또 어떤 기억들은 거짓말처럼 내 것이 아닌 양 지워지기도 한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싸이코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내게도 어린 시절 그런 기억들이 몇 몇 있지만 다행히도 흐릿한 안개마냥 힘을 잃어 가슴을 찌를만큼의 힘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면 제롬은 자신의 머리를 짓이기며 `자유! 자유! 자유!`를 외치며 죽어간다. 아니 원치 않는 내부의 적을 죽이는 것이다. 그를 죽이면 정말로 제롬은 자유로워질까? 내 안의 적을 없앤다면 고뇌나 혼라스러움 없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내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그 남자를 보며 `자아`에 대해 많은 걸 생각했었고 의문스러웠다. 내가 믿고자 하는 내 마음과 부정하고픈 또 다른 마음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한 사람을 본 것은 이 책을 읽기 전이였다. 소설가라는 사람들을 무지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특별할 것 없고 하챦을 수도 있는 일상의 일들이나 의문을 그들은 훌륭한 텍스트로 풀어나는 것 말이다. 나는 그의 고뇌를 보며 결국은 `저래서 세상 대부분의 남자들은 믿을 게 못 돼`라고 끝을 내지만 아멜리 노통은 제롬과 텍스토르를 창조했으니 역시 난 독자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