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
-
단편집이라 해도 나는 순서대로 읽는다. 이 책에서 처음 밑줄 친 문장은 이것. `그 나이에도 의심이 적고,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들이란 대개 그들을 부드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띄고) 모든 부드러움에는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80년생 작가의 눈부신 비상을 처음부터 의심쩍은 눈으로 봤던 탓인지 그녀의 경쾌한 리듬감이 내게 잔인하게 부딪혀왔다. 작가가 써놓은 문장은 행간까지 피부 속속들이 세밀한 주름 하나에도 울림을 주는데, 그 싱싱한 소설들은 왜 곱게 자란 주인집 아이처럼 느껴지는 걸까.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심 많은 노파와 같던 내 느낌은 소설`집` 안의 단편들을 하나씩 제껴나가면서 죽어나갔다. 스카이콩콩을 타는 운동에 뭐랄까 어떤 `정신`이 있다고 말한 작가의 단언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가볍고 유쾌한 스카…(생략)

슴아파 텔레비전 위에 용돈을 얹어둔다. 게다가 엄마를 버린 아비의 마지막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남편 없이 살아온 엄마의 고단한 일생을 어루만진다. 아비의 부족한 공간 안에 내가 들어가 아비 안에 나, 내 안의 아비를 만든다. 그러니 이걸 금지옥엽으로 자란 주인집 아이의 비단옷처럼 봐야 성이 풀릴 만큼 내가 모진 사람도 아니다. 나는 빼꼼이 열린 문틈으로 푸른빛이 나오려 하는, 이 작가의 시선에 어느 순간 꼬여 있던 마음을 풀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밑줄을 친 문장은 이거다. `노파가 열쇠를 구멍에 꽂고 이리저리 흔들자 현관문은 조루증상처럼 힘없이 덜컹 어둠을 토해냈다.` 이 한숨 같은 표현을 제치고 들어간 작은 방에서 작가는 꼼짝 않고 앉아 포스트잇에 빼곡이 글을 써넣는다. 나는 누구이며 누가 될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자기를 찾아가는 길이 미로처럼 뻗어 있는 포스트잇들을 방의 다섯 면에, 그러니까 천장까지 빈틈없이 붙인다. 그리고 포스트잇이 붙여지지 않은 창문과 문짝을 열자 바람이 술렁술렁 불어 들어오고 불어 나가며 수많은 포스트잇이 파르르 몸을 떤다. 작은 방은 하나의 거대한 종이물고기가 되어 비늘을 너풀거린다. 이 종이물고기의 뱃속은 안온하면서도 불완전하다. 숨어있기 좋은 방이지만 숨어서 작당을 품기도 좋은 방이다. 그러자 마치 작가가 내게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시작해봐, 라고. 청춘의 시작은 그렇게 불온한 비늘의 반짝거림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서서히 갈라지는 벽을 가리고 있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지라도. 폐허처럼 된 다섯 면의 벽 무덤에서도 그 종이 비늘은 팔딱거린다. `침도 별로 없는 입을 열며` 작가가 말하는 것 같다. `어쩌면 희망 때문일 거라고.`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라는 유행어처럼 작가에게 마구 풀어지는 마음이 느껴진다. 어둠을 토해내는 좁고 음험한 공간에서도 스카이콩콩의 경쾌한 리듬을 집어넣는 것이, 그녀의 작법이고 나의 삶이어야 할 것 같다는, 무작정 박수치고 싶은 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