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싱아

나는 한동안 베스트셀러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던 이 책을 자주 스치듯 보면서 제목 중에 싱아라는 것이 무엇일까.. 의아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문장에서 책의 전체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건 분명한데 도무지 그 싱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마음 한 구석 미묘하게나마 지니고 있었다. 혹시 글자도 비슷한 상아가 아닐까란 엉뚱한 생각까지 하면서도 정작 이 책을 읽게 된 건 그러한 생각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우연히 친구에게 빌려 읽게 된 이 책에서 나는 싱아가 생소하게 느껴졌던 처음과는 다르게 나와 맞닿아 있는 무언가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소설로 그린 자화상, 유년의 기억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듯이 이 책은 작가 박완서님의 기억, 특히 유년의 시절에서부터 50년대 6.25를 거쳐 1.4후퇴까지의 살아온 날들을 순전히 기억에만 의지하여 쓴 한편의 자화상이다. 할아버지와의 관계와 시골의 풍경…(생략)

린아이의 천진함을 그대로 전해 받을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유년의 시절은 구체적인 부분들에서는 물론 작가의 얘기와는 다르겠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계절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굳이 배우지 않아도 벼가 나무에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그리고 박적골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 기회가 없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시골이다. 넓음 자체로 자유와 순수를 느꼈으며 그저 지나가다가도 산딸기 같은 것들을 거리낌없이 따먹으며 그 넓음을 누볐다. 물론 모든 것이 좋은 추억으로만 남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드넓게 펼쳐진 자연처럼 기쁨이나 아픔의 감정들을 포용력 있게 수용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시골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다시 작가의 글을 쫓아가서.. 어느 날 그녀의 할아버지는 뒷간에서 넘어져 못 일어나게 되고 할아버지의 애지중지 속에서 의기양양했던 그녀는 책에서도 나와있듯이 또 한번의 아버지 상실을 겪게 된다. 이 후 엄마의 뜻대로 오빠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 생활하게 된다.
그녀는 현저동이라는 꼭대기에 위치한 동네의 어느 초가집의 문간방에 세들어 살게 된다. 이 때부터의 서울 생활은 시골에서와는 대조적으로 펼쳐지며 어린 그녀를 더욱 더 의아하게 만든다. 도시에 처음 와서 가졌던 황홀한 인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시골에서는 알 수도 없었던 가난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 엄마와의 갈등도 이 때부터 조금씩 나타나게 된다. 집 주소를 두 개 외우고 박적골에서는 넘치거나 마른 적도 없는 물을 아껴 써야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구는 엄마의 모습 등이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어린 그녀에게는 이상하고 모순투성일 뿐이였다. 그런 그녀와 엄마와의 갈등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던 것은 과묵하고 우유부단한 오빠 그리고 시골에 갈 수 있는 방학을 통해서였다. 그녀에게 오빠는 잘난 사람으로 보였고 힘든 서울 생활에 있어 자랑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나 역시 갑자기 도시로 전학을 오게 되는 바람에 생활의 리듬이 바뀌게 되었고 끊임없이 부족한 것들에 대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이란 것은 어쩐지 껄끄러운 느낌으로 전해졌고 괜시리 화도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시골에 있을 땐 서울 아이로, 도시에 있을 땐 시골에서의 경험을 자랑스러워하며 주눅들지 않으려고 심적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홀로 학교를 오가며 거치는 동산에서 싱아를 찾기 위해 산 속을 헤매는 작가의 심정을 비슷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학교 생활을 통해 당시가 일제식민지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조선말은 한마디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일본 선생님에게서 일본말을 배웠다. 일제 식민지 속에서 창씨개명 오빠가 취직한 조선총독부 말에 벌어진 2차대전과 정신대.. 모두 뼈아픈 작가의 기억이자 우리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물건을 뺏기는 일도 억울한 일인데 하물며 나라를 빼앗기고 수모를 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분노할 일이다. 만약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그 속에 살고 있다라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이 때의 일제의 만행들은 여러 가지 자료들을 통해 많이 봐왔으며 이로 인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일제 식민지의 잔재는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가..
그러한 와중에 작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녀는 엄마 오빠와 함께 시골집으로 달려갔다. 비록 상중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서 엄마에게 모진 말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할아버지의 잃음을 슬퍼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건.. 할아버지와 나누었던 사소하지만 행복했던 기억들 속에서 이제 더 이상은 할아버지를 볼 수 없음이 어느 누구의 슬픔보다도 더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멍하고 허탈한 느낌으로..

시간이 흘러 일제로부터의 해방의 기쁨을 다 만끽하기도 전에 우리 민족의 최대의 비극인 6.25가 발발한다. 작가는 그 날 아침 등교하는 길에 국군의 이동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씩씩하게 박수도 치고 하면서 학교에 와서 강의를 들었다. 영화 속의 얘기가 아니다. 결코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야 할 일이 현실에 나타난 것이고 작가는 일반인으로서 겪는 전쟁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전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표현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할 수 없이 그저 기다려야만 하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이 오히려 전쟁을 더욱 더 공포스럽고 두려운 존재로 느끼게 했다.
포탄이 하늘을 가르고 폭격이 심한 거리.. 나는 지금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대상도 모를 누군가에게 감사를 드린다. 현재도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완전히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의 상태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통일의 방법은 평화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공포스럽고 시끄러운 포탄 소리보다 들판에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와 시냇물이 흐르는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임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새 날이 밝았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작가는 또 다시 현저동의 어느 집에서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된다.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찬란한 예감으로 공포를 몰아내고 있는 작가의 모습으로부터 나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책의 끝 부분은 완전한 결말이 없이 그 시간에서 끝나버리는 듯 하지만 그 희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는 소리 없는 외침은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그녀가 자신의 삶을 고백할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그 많던 싱아는 다 누가 먹었을까..
싱아란 산기슭에서 흔히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나 예전에 시골 아이들이 즐겨먹던 풀을 말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흔히 먹을 수 있었던 그 싱아라는 것은 바로 어린 날의 기억이자 자유와 순수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란 나름의 추측을 해본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된 시절을 기억만으로 소설처럼 엮어낸 작가의 재생능력이 매우 놀랍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가 유년 시절에 어디서든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었던 싱아, 즉 자유로움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찾아왔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녀의 유쾌했던 박적골에 대한 기억에 새로운 희망을 더함으로써 암울하고 어두웠던 상황을 잘 극복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에겐 재미있었던 유년 시절만큼 아픈 시절의 기억들도 모두 소중하게 느껴진다.

얼마 지나지 않은 기억이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되돌아 볼 수 있었고 전쟁에 대하여 생각해볼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작가 박완서님의 박적골은 지금 북녘의 땅이라야 직접 가볼 수는 없는 곳이지만 나의 그 곳은 언제 한번 꼭 가봐야겠다. 풀로서의 싱아는 사라졌겠지만 희망으로서의 싱아, 곧 자유는 늘 마음에 간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