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을 읽고

태백산맥을 읽고
모든 학문의 궁극적 주제는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정의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거칠고 험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현재에 이를 수 있었느냐를 아는 것은 현재를 나를 이해하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된다. 그렇기에 인간으로 태어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의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작금의 한국 현대사에서 보이고 있는 문제점들은 그 근원이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굴곡이 심하고 왜곡된 한국 근대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지금을 알기 위해 현대의 역사에 초점을 두고 신문을 본다던지 뉴스를 접하곤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내게 살아 있는 한국 현대사의 진면목을 접하게 해주었다. 각종 한국사 개…(생략)

와닿을 경우 잡은 책을 덥는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군대 시절 《삼국지》를 하루에 한권씩 읽던 병적 독서광 생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태백산맥》을 읽기로 작정한 것은 그 당시 보통 심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흐름에서 일탈해 보고 싶었고, 방학 때 뭔가 가슴에 남는 책을 읽고 싶었고, 사람들이 그토록 권하던 책을 뒤늦었지만 도전해 보고 싶었고, 결정적으로 한국 현대사를 다른 각도에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인간적으로 가장 부러운 사람을 꼽으라 하면 아마도 염상진이 아닐까 싶다. 그의 날카롭고 지적인 면모와 뛰어난 상황 판단력과 결단력은 소설상의 주인공이란 것을 잊어버리고 그의 풍모를 닮고 싶게 만들었다. 한편 이런 염상진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당시 한국의 현실로서는 그의 사회주의 이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김범우. 역사학을 전공한 나이기에 그에게 쏠리는 관심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해박함과 세계사를 조망하는 능력은 그런 위기 상황에서 더없이 빛을 발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민족지상주의적 견해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물론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김구와 같은 인물이 내세우는 그런 통일과업에 일차적 목표가 있어야 함을 인정하지만 민족만이 그 과업의 일차대상자가 된다고 하는 점을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난 대한민국의 `국민`을 내세우고 싶다.
그렇지만 정작 처음부터 관심을 가는 인물은 염상진도, 김범우도, 김범준도, 손승호도, 서민영 선생도, 이학송도, 안창민도, 하대치도 아니었다. 나의 개인적 성향과 가장 잘 맞는 존재는 바로 정하섭이었다. 그의 부르주아적 출신성분이, 잘생긴 외모에, 흠모하는 여자가 있음이 부러웠던 것은 아니다. 아니 부러웠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그런 차원의 것이라기보다 그의 조직 속 역할이 내게 와 닿았던 것이다. 즉 그의 정보원으로서의 역할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내게 아주 적합했으리라는 상상적 공감 때문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정하섭은 언제 나타나나 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위와 같은 생각들은 이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던 긍정적인 면들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주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으며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앞서간 사람들에 대찬 각정 때문이었다. 그들의 그 숭고한 노력과 피흘림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 혹은 우리가 없었기에 말이야. 비록 그들의 투쟁이 사회주의적(혹은 공산주의적)이고 소위 `빨갱이`노릇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땅의 역사에 강력히 민중의 이름을 드러내었고 평등사상을 주창하였고 실행했었다. 일제의 탄압과 미군정의 무지에서 비롯된 혼란기를 살아간 그들이지만 역사의 흐름을 더 이상 과거로 되돌리기를 거부하고 그 역행의 줄기에 온몸으로 맞선 것이다. 과연 내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반미과 친미의 연원을 찾으라하면 난 해방 후의 時空에서 있었던 데서 찾고 싶다. 물론 개항기의 친미적 경향도 그 원인이 될 수 있겠으나 우리에게 직접으로 와 닿은 시대는 이 당시가 아닌가 싶다. 혹자는 미국의 헌신적인 노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할 것이고, 혹자는 그들의 폭압적이고 잔인함에 치를 떨 것이다. 이는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다. 현실의 우리는 그들에 대한 평가를 우리의 현실에 맞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태배산맥》을 읽으며 재밌었고 한편으로는 치밀오르는 감정을 주체지 못한 때도 있었다. 그 만큼 이 책은 살아 생동했고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마도 역사의 줄기에 몸을 기댄 탓이었으리다.
앞에서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정의했었다. 그렇다. 이 책은 내게 한국 근현사회를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작금의 문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었다. 역사를 살아간 사람들은 죽었지만 그 속에 살다간 이들의 노력은 그렇게 사사지지 않고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비록 `역사의 힘`이라고 하는 거창한 에너지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변화와 시대의 역동성에 기대고 싶다. 그것은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힘이자 원동력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