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핵심

암흑의 핵심
메디치가 앞 마당에서 활발하게 논쟁되어온 인류의 숙제를 커츠는 죽음의 문턱에서 답을 찾게 된다. 주인공인 말로나 커츠처럼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험난한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도시에서 쾌락적이고 태고적 원천인 밀림의로의 여행이다.
여기의 도시에서는 정해져 있는 규칙에 따라 순응하고 좀 더 안락하고 포근한 의자에서 소위 이성이라고 하는 노끈으로 그들의 심장을 꽁꽁 묶어두면서 이미 먹이사슬 구조가 끊어져 버린 죽음이 존재하는 곳이다.
반면에 콩고강의 상류인 그 깊고도 깊은 밀림 속에서는 인류의 시초인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의 동산이 원시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에서는 칸트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네들이 하고 싶은대로 그저 자신의 내면의 응답에 부름을 받듯이 본연에 충실한 삶은 살아가고 있다.…(생략)

결국 안일한 내 삶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원작의 기본틀을 해치지 않으면서 각색을 잘한 좋은 작품이었다. 결국 암흑의 핵심에서 암흑이란 어두운 색채를 띄는 그러한 형질이 아니라 밤하늘의 깜깜한 우주의 공간처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어쩌면 티없이 맑고 깨끗한 위대한 성인들이 해탈의 경지에서 영롱한 빛을 보게 되는 혜안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린치의 어둠이 손 안에 잡히는 익숙함 속에 낯선 공포라면 아프리카 콩코의 깊은 밀림을 배경으로 한 콘라드의 어둠과 공포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위압적이다.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밀림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 깊이와 무게를 쉽사리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코폴라라는 능력있는 감독의 덕분에 콘라드의 어둠을 영화라는 또 다른 작품으로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조셉 콘라드의 작품 <암흑의 핵심>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플래툰>, <풀 메탈 재킷>, <햄버거 힐>, <그린베레>, <머나먼 정글> 등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무수한 영화 중에서 <지옥의 묵시록>이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데에는 감독의 역량과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뿐만 아니라 원작이 갖고 있는 풍부한 문학적 상징도 빼놓을 수가 없다.
<암흑의 핵심>은 20세기 초 식민주의가 정점에 달했을 때 주인공 말로가 벨기에령 콩고 내륙의 주재소를 연결하는 증기선 선장이 되어 커츠라는 미지의 주재원을 찾아가면서 겪었던 밀림 속의 경험담을 작가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데, 첫째는 제국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라는 정치적인 시각이며 두번째는 한 개인이 암흑의 핵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 가운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는 개인적 깨달음의 드라마로 보는 시각이다. 어쨌든,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암흑의 핵심>을 원작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원작을 완전히 해체해서 조립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전혀 다른 작품이다. 즉, <암흑의 핵심>이란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코폴라가 베트남전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실을 뼈대로 삼아 그 위에 암흑, 공포, 광기, 죽음, 자아의 발견이라는 <암흑의 핵심> 속에 담겨 있는 문학적 모티브를 코폴라식 감수성과 연출력을 모르타르 삼아 매끄럽게 덧붙인 것이다.
하지만, 콘라드가 작품 전반에 걸쳐 애써 묘사한 밀림과 초록의 암흑 속에서 작가가 실제로 느꼈던 살아있는 공포를 스크린으로 보여주는데는 아무래도 좀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밀림에 관해서는 존 부어맨의 <에머랄드 포레스트>를 따라갈 작품이 없다고, 또 헤어초크도 만만치 않다고 친구 하나가 귀뜸해 주었다. 얼른 구해서 봐야겠다.
최근 이라크전 이야기이 떠오른다. 명분 없는 식민지 전쟁이 겁 없이 자행되는 가운데, 식민주의 속에 내재된 폭력성과 탐욕 때문에 식민주의는 끝장난다고 보았던 콘라드의 비전이 과연 현실화 될지는 더 지켜봐야 될 것 같다. 100년 전에는 발전과 합리성이란 이념으로 식민지를 접수했던 제국들이, 오늘은 민주주의와 인권, 독재타도,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라는 좀 더 세련된 명분을 갖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 앞으로 착취와 고통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만 남기는 것 같아 좀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