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가는 길을 읽고 나서 삼포 가는 길

삼포 가는 길
저자 : 황석영
출판사 : 창작과비평사
제목만을 보고 실제 소설과는 다른 나만의 소설을 미리 머리 속으로 그려 보았다. 대부분의 소설이 내가 미리 상상한 내용과는 많이 어긋난다. 하지만 미리 책의 내용을 생각하다 보면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호기심들이 책을 읽는데 재미를 더한다. 미리 상상하며 품었던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재미... 이런 재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런 버릇이 생겨 버렸나 보다.
`삼포가는 길`이라... 책 제목을 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삼포.. 삼포라... 왜 많고 많은 지명 중 삼포라는 곳일까? 삼포라는 곳은 유명한 관광 명소도, 사람이 많은 대도시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포만의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여느 지방들과 다를 곳이 없는 평범한 지방... 작가가 굳이 이 곳을 선택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혹시 삼포에서의 추억을 그리…(생략)

는 어디 한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며 일자리를 찾는다. 정착해 있으면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 밥을 빌어 먹기 위해 그는 떠돌아 다녔고, 그래서 떠도는 것이 몸에 베어버린 천상 떠돌이다. 떠돌이인 그가 넉 달동안 몸을 담았던 곳을 떠나 새로이 일할 곳을 찾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 된다.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갈피를 잡지 못해 담배를 태우는 영달의 곁으로 두번 째 주인공인 정씨가 다가온다. 정씨 또한 영달처럼 떠돌이 임을 그의 차림으로 알 수 있었다.
정씨가 매고 있는 맹꽁이 배낭, 떠돌이에게는 없어 되는 안 되는 물건이지.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필요한 간단한 물건을 담고 다니기에는 이만한 물건도 없을 꺼야...
서로가 가까이 대하는 처음인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는 두 주인공. 이 둘이 역어 갈 이야기가 슬슬 나의 구미를 당겼다.
넉달 동안 묵었던 밥집에서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정씨는 서로의 첫 대화 거리로 선택 했다. 생각해 보면 그만한 이야기거리도 없다.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사건은 그 일이 처음일테니... 넉 달 동안 묵었던 밥집 여주인 청주댁과 영달 사이의 은밀한 관계를 밥집 주인, 즉 청주댁의 남편에게 들켜 허겁지겁 도망쳐 방아실에 숨은 영달. 그리고 남편에게 죽도록 맞는 청주댁을 지켜본 정씨. 정씨는 조금은 비꼬는 듯한 말투로 영달과의 인연의 끈을 연결한다.
서로가 떠돌이 임을 알고 있는 두 주인공을 갈 곳을 묻는다. 갈 곳이 없는 영달과는 달리 돌아갈 고향이 있는 정씨. 그 고향이 삼포이다.
무언보다도 삼포의 의미가 궁금했던 나는 정씨의 고향이 삼포라는 사실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는 나의 상상이 맞은 듯 했기 때문이다. 정씨가 내가 생각했던 노인과 같은 처지의 사람일 것이라는 예감에 괜시리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는 정씨가 삼포에 대한 옛 추억을 떠올리면 되는데... 은근히 내가 상상한 소설과 맞아 떨어지길 바랬었다.
정씨의 고향 삼포는 풍요로운 곳이다. 감자를 일구고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곳.. 나룻배가 다니는 곳... 정씨는 10년 만에 그리던 고향으로, 떠돌이 생활을 끝을 위해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런 정씨 곁에서 갈 곳 없는 영달이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영달은 삼포가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 정씨를 바라본다. 어짜피 갈 곳도 없는 몸, 말벗이라도 있으면 덜 심심하겠지 하며 정씨를 따라 나선다. 영달은 속으로는 덜 외롭겠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떠돌이로 살았다면 사람이 많이 그리웠을 것이다. 고향이라는 곳도 갖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달은 정씨의 고향 삼포를 통해 고향을 정겨움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정씨를 따라 그 길로 간 것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불연 듯 들었다.
삼포로 향하는 길에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고, 떠돌이로 살아온 일생을 서로에게 이야기 하면서 둘은 쉬지 않고 걷는다. 추위에 떨며 떠돌이 생활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함께 있어도 정겹다기 보다는 어쩐지 더욱 초라해 보였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들린 국밥집에서 둘은 백화라는 갈보 아가씨에 대해 듣게 된다. 그리고는 국밥집에서 떠날 때 주모에게 이 아가씨를 보게 되면 꼭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백화의 등장은 내게 작은 실망감과 더 큰 호기심을 안겨 주었다. 일단은 내가 상상한 소설이 틀렸다는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백화가 등장했다는 것은 정씨의 고향 삼포에 대한 추억이 이 소설의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해 지는 것, 백화, 정씨, 영달은 어떤 관계라는 것일까? 정씨와 영달은 떠돌이라지만, 백화는 머지? 술집 싸구려 아까씨와 떠돌이라... 참 어울리지만 현실에는 연관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술집 아가씨는 돈이 있는 사람만 상대한다. 떠돌이들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연관되는 것이지? 3명의 주인공이 어떻게 서로 말을 트게 되는 지가 궁금해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너무도 빨리 읽고 있었다.
퍼붓는 함박눈은 백화와 두 사람의 만남의 기회를 만든다. 두 사람은 함박눈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월출로 가던 행로를 우연히 인연의 장소인 감천으로 바꾼다. 잠시 동안 숨을 돌리기 위해 앉은 구멍가게,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와 너무 어울리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백화. 영달과 정씨는 나무 뒤에서 소변을 보는 백화를 발견하게 된다. 보자마자 그 소변보는 여자가 백화라는 것을 예감한 영달과 정씨는 서로를 보며 웃는다.
영달과 정씨의 곁으로 주춤 다가오는 백화에게 영달은 국밥집에서 찾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백화를 잡아 국밥집에 데려가 포상근 만원을 받아 낼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런 영달의 말에 백화는 당연히 가슴 졸여 하면 사정하거나 도망가는 장면이 내 머릿 속을 스쳤다. 하지만 백화는 빌지도 않았으며 도망치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영달을 쓰려 뜨리고는 소리쳤다. 백화를.. 나를 잡아 갈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 보라고...
그녀의 이런 당당함은 처음 나에게 기가 막힌 모습으로 비춰 졌다. 하지만 한참을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힐 것도 없었다. 그녀는 영달과 정씨가 평생을 떠돌이로 살았듯이, 평생을 갈보로, 추잡한 술집 여자를 살았을 것이다. 그녀의 당당함은 고달픈 그녀의 인생을 비추는 하나의 모습일테지...
백화 또한 정씨처럼 일상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이였다. 고향으로 간다는 것, 같은 길을 통해서 가야 한다는 인연을 맺게 된 3사람을 함께 길을 걷는다. 3사람이 걷는 길은 아무것도 없다. 세 사람이 살아 왔던 이야기가 배경처럼 깔릴 뿐이다. 힘들고, 고달팠던 세상 살이... 그리고 세 사람을 더욱 춥고 힘들게 하는 눈만이 소복소복 쌓일 뿐이다. 눈은 소설에서 내내 세 사람의 초라함과 고달픔을 더하게 한다. 백화는 걷는 내내 이야기를 한다. 모두가 시시껄렁한 이야기지만 그 대화가 세 사람은 즐겁다.
눈에 옷이 젖어 추워진 세 사람은 폐가에 들어가 불을 피우고 추운 몸을 녹인다. 백화는 영달에게 관심을 보인다. 영달 또한 그 관심이 싫지는 않는 듯하지만, 백화 같은 여자를 심각히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 사람은 폐가에서 나와 또 다시 눈 속을 걷는다. 길을 걷는 도중 백화는 다리를 다치게 되고, 그런 백화를 영달은 자신의 등에 업는다. 애뜻한 연민일까? 아니면 진심어린 마음일까? 두 사람은 서로가 남모를 감정 조금이나마 갖게 된다.
아마, 백화와 영달이 그저 평범하게 서로 만났다면 충분히 가정을 꾸리고 행복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가정을 꾸리기에는 두 사람이 살아온 생이 너무도 험하다. 둘 모두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 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영달은 떠돌아 다녀야만 하는 운명이고, 백화는 한 남자만을 보며 살기는 힘든 운명이므로...
마침내 감천에 도착한 세 사람.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에 임박해 왔다. 열차를 타기 위해 온 대합실. 세 사람의 이별의 장소이다.
이 곳에서 백화는 영달에게 마지막 부탁을 건네 본다. 갈 곳이 없거든 자신과 함께 가자고, 일 자리도 구할 수 있다고 하며 영달이 함께 해 주기를 바란다. 영달은 정씨를 따라 삼포로 갈 것인지, 아니면 백화를 따라 백화의 고향으로 갈 것인지 잠시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영달은 백화나 자신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정씨를 따라 삼포로 가기로 결정한다. 백화는 영달을 붙잡지 않았다. 백화 또한 자신이 영달을 붙잡을 수 없음을 알기에... 백화는 열차에 오르기 직전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안았던 자신의 진짜 이름, 이점례라는 본명을 알려주며,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이렇게 백화가 고향으로 떠나고 영달과 정씨만이 남게 된다. 삼포로, 그리운 고향으로 가는 열차만을 기다리는 정씨, 그리고 일자리를 찾는 영달, 이 두 명의 떠돌이는 대합실 의자 기대어 앉는다.
고향만을 그리며 열차를 기다리던 정씨는 한 노인에게 기막힌 이야기를 듣는다. 고향 삼포에 대한 이야기...
정씨가 그리던 풍요로운 고향 삼포는 1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고기를 잡으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바다는 육지로 메꿔져 공사판으로 변한지 오래이다. 나룻배를 띄우는 일은 바다가 사라지면서 없어졌다 삼포는 더 이상 섬도 아니다. 이제는 육로가 놓여진 한 지방일 뿐이다. 정씨가 그리던 모습은 다 사라져 버린지 오래이다. 10년이다. 고향은 10년 동안 정씨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 했을 뿐이다.
지금의 삼포는 더 이상 정씨가 찾는 곳이 아니다. 안식의 장소가 필요했던 정씨에게 희망 같았던 고향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현재의 삼포는 떠돌이 정씨에게 그저 돈벌이 만이 될 수 있는 공사판이 되버렸다. 마음을 둘 곳을 고향에 가보기도 전에 잃어 버린 정씨... 이제 정씨도 영달과 다를 것이 없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 정씨는 고향을 찾아 열차에 오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저 일거리를 찾기 위해, 또 다시 밥을 빌어먹기 위한 한 장소로써 삼포로 향하는 것 뿐이다.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허망해진 정씨의 심신을 싣고 기차는 삼포로 향하는 것으로 마지막 페이지가 장식 된다.
삼포라는 곳이 굳이 설정된 이유는 정씨의 마지막 휴식처를 자연스럽게 소멸시켜 버리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산업화가, 그가 그 동안 일해 왔던 일자리가 그의 고향을 잃게 한 것이다.
영달과 정씨, 그리고 백화는 산업화 된 도시에서 서서히 모든 것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표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을 찾기 위해 떠도는 일생 동안 그들이 얻은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잃어 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 속에서 그들의 고향을 잃어 버렸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소중한 고향을 잃어 버렸듯 나는 나란 주체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평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 있는 사색의 시간이 였다. 가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 한번 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즐기기에 좋은 책 한권을 발견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