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초를 읽고 도연초

도연초,를 읽고
편하게 읽기에 좋다. 수필이라는 장르에 관한 내 생각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도 아니고,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에 읽히는 데로 아무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가는 것이 바로 수필인데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짜르르 가늘게 떨려온다. 그래서 나는 수필 읽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마치 남의 일기를 엿보는 기분에 젖어서 흐름을 타듯 글을 읽노라면 마치 타인의 세계에 공감하고 부정하며 동화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소설의 허구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어느 누군가의 진실. 그들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내게 있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도연초』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느 이름 모를 풀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깊은 산속 어딘가에서 혼자 피어 숨쉬고 있을 연약하지만 강한, 맑은 향이 나는. 그런 풀꽃이 머릿…(생략)

온 일기장은 내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막부시대라고 했던가.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잠시 스치듯 배운 일본사가 기억이 나면서 그때의 풍경과 요시다 겐코의 글이 겹쳐지듯 보였다. 내게 있어 일본이라는 나라는 동적인 것보다 정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런 선입견도 글을 보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나는 글을 읽을 때, 영상으로 상상을 하면서 읽는 편인데, 『도연초』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 시대 일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막부시대. 그 때의 역사는 아마 피로 물들고 칼부림이 난무했겠지만 그런 모습마저도 내 머릿속에서는 정적으로 느껴졌다. 『도연초』에는 전쟁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더욱 그 때의 일본이 평화롭게 느껴지는 듯 했다.
옛 글을 700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읽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또 묘하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그 시대의 모습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때의 모습이 많이 달라서일까, 마치 지구가 아닌, 우주에 있는 어떤 다른 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고전은 내 선조들이 살았던 때이기도 하고, 어쨌든 지구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지금은 살아있지 않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씌어져서 내게로 넘어온 것인데도, 볼 때마다 생소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특히나 『도연초』 같은 경우에는 읽으면 읽을수록 흠뻑 젖어드는 여유로움 때문에 더욱 그런 듯싶다.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아주 바쁘게 살아간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 모르고,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시간에 식사를 하고, 빨리 빨리를 외치며 클락션을 울려대고 그 울부짖음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지하철의 소음에 무료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역을 기다릴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여유란, 잠들기 바로 전의 해방감, 혹은 편안함이다. 물론, 잠들기 전에도 몇 시간 후에 다가올 내일을 생각하며 마음이 조급해진다. 문제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 보다 그런 삶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다. 가끔 그렇게 바쁜, 또 거기에 익숙해진 내 삶을 생각하면 거의 울음이 나올 정도로 슬퍼지고 만다. 그러나 『도연초』에는 그런 피로와 바쁨이 없다. 읽다가 잠시 눈을 깜빡이면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것과 같은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마치 겐코가 누렸던 여유가 내게 전이되는 것과 같은 그런 편안함과 같은 여유. 그리고 바쁜 도시의 생활과 잠시 분리되어 다른 기류에 휩싸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이 좋아지는 이유가 어딘지 모르게 풍겨지는 불교적인 색체인 것 같아서 일본에서는 불교가 많이 전파 되었구나 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쓴 요시다 겐코는 원래 스님, 그러니까 법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불교 특유의 정취와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일본의 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놀라웠다. 요시다 겐코가 이것저것 풀어놓은 이야기들 가운데 나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또 거부했다.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벗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여행, 언어로 명확하게 말하기 힘든 정서에 대한 생각들 또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따위를. 비록 글로 적어 놓은 것이었지만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근 조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어느새 작은 울림이 되서 마음속에서 한참을 맴돈다. 그는 7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었는데도 그랬다.
애욕과 같은 이야기를 할 때는, 승려가 저런 생각을 해도 되는 가 싶을 정도로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이야기도 있었고, 대중에게 발표하는 글이라기보다는 책의 제목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붓 가는 데로 적어놓은 글1)들 같았다. 244단이나 되는 글들은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펼쳐진다. 그 이야기들은 비슷한 내용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도 있고 공감가기도 하고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244단이나 되는 많은 이야기들. 특히나 주제 없이 나열된 이 글들을 보며 너무 많이 읽어버려 과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술술 읽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그의 글들이 군더더기나 기름기가 많지 않고 소담하며 담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뭔가 조금은 싱거운 일본 음식처럼. 기름기가 없는 음식은 언제 먹어도 뒤끝이 깔끔하고 기분이 좋다. 과식한 듯한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요시다 겐코의 글도 그런 것 같았다. 그가 펼쳐놓은 생각들에 감화를 받으면서 너무 놀라운 생각이다, 라는 느낌도 들지 않고, 아 그렇군, 그랬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혹은, 이건 좀 아닌데…,하는 생각을 하며 넘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고 받아들여져야 할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말 중에서는 현대의 정서, 좁게 말해 내 정서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이따금 눈에 띄었다. 그냥 말 그대로 `상념`만을 적어둔 부분이라던가, 여자에 대한 편견들, 혹은 제목과 맞지 않는 내용-나중에 알고 보니 제목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과 같은 것에서 약간 이맛살을 찌푸린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내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것 같아, 잠시 책장을 넘기지 않고 평소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런 부분이 꼭 나쁘진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유명한 사람이 지은 책이고 그의 생각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나도 책을 읽으며 사고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참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겐코 또한 자신의 상념 뿐 아니라 자기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적어두기만 해서 그 문제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특히 `늙어 추함` 같은 경우가 가장 그랬다. 처음부분과 뒷부분에 대한 겐코의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 그것이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늙을 때 욕심을 부리지 말고 겸허하게 늙어가자는 말인지 조금 헷갈려서 그의 생각이 뭔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후자의 방향으로 결정을 내려버렸다.
옛 사람의 생각들과 현대인의 생각. 그리고 겐코의 생각과 나의 생각. 그 사이에는 세월의 갭에 의한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오히려 작가와 소통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어서 좋았다. 나는 문제를 던져주고 작가 스스로가 해결해 나가는 것 보다는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더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와 독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일본은 거리상으로 많이 가까운 편이지만 문화적인 차이는 상당히 큰 것 같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또한 문화적 차이가 크겠지만 내가 읽어본 것이라고는 외국 수필 두 세편과 대게 한국 수필이었는데 이번에 다른 나라 수필을 읽으면서 문화적인 차이가 크구나 하는 걸 느꼈다. 게다가 고전이다 보니 천황에 대한 것이라던가, 옛 풍습에 관한 것이 나오면 이건 뭘까, 의문 나는 점도 많이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아래쪽에 각주가 많이 달렸던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각주 같은 걸 싫어하는 편이라서 책을 읽을 때 각주가 있어도 글씨도 작고 읽어보기 귀찮아서 무심코 지나치곤 했는데, 이번에는 꼼꼼하게 살펴봤다. 책에 있는 내용자체 보다는 각주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도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문장을 좋아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맛볼 수 있는 음식과 같은 깔끔한 글을 사랑한다. 겐코의 글을 읽어가면서, 그의 생활과 사상을 조금씩 엿보면서 내 생각을 조금 더 강화시키고 또,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좋았다.
14C의 일본은 무사의 시대라고 했다. 하극상이 펼쳐지고 국토가 피로 물들었던 무사들의 시대에 한가로움을 생각할 수 있었던 문인, 겐코의 여유로움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7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의 수필을 읽으며 계속되는 교통체증과 바쁨, 피곤함에 지쳐가는 이 시대에 한가로움을 찾으며 그의 글에서 젖어드는 정취에 빠져들며 그가 느꼈던 여유로움을 함께 누려보고 싶다. 그리고 처음 생각했던 『도연초』의 제목처럼, 그의 글에서 한들거리는 여린 풀꽃을 상상하며, 또 내가 생각해낸 『도연초』라는 꽃의 풀내음을 맞으며 다시 맞이할 바쁜 내일 보다는 지금의 한가로움에 깊이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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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초』/요시다 겐코 지음/ 바다출판사/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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