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남자네집을 읽고나서 그남자네집

그 남자네집을 읽고나서..
몇 년 전, 자신의 문학적 위상과 권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으며 자신의 저작까지 일부 사람들에게 구매거부당했던 한 작가가 있었다. 이는 당시 문학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수많은 문학인들에게 이슈거리로 회자되었고 사람들은 극명한 이중 반응으로 갈리었다.
문학인의 에스프리는 순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문학인은 문학인으로 불리울 수 없다는 주장. 그리고 아무리 문학하는 사람이로서니 정치적 견해를 갖는게 무어 그리 그릇된 것인가, 또 설령 그 작가의 생각이 틀렸다고 해도 그가 쓴 소설책들까지 리어카에 가득 채워 돌려주는 퍼포먼스를 한 것은 너무 심했다는 주장, 이 두가지였다.
그 사건이 신문에 오르내리며 각개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던 때, 내가 취한 개인적 입장은 소설가가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는 있으나 특정 정치권력에 야합해서는 안된다였던 …(생략)

작품을 조금은 늦게 접하면서 그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있다. 다름이 아닌 그녀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말이다. 일흔 셋의 나이에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작가 박완서. 결코 이른 나이라고 할 수 없는 마흔에 등단한 것이 억울해서인지 이후로 펴낸 작품만 해도 수십권에 육박한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나이에 젊은 시절 첫사랑을 추억해내는 여력을 뽐내며 또 한권의 책을 펴내다니... 누가 그녀의 필력과 창작욕을 따라갈 수 있을는지... 이번 작품은 작가 박완서를 새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된 듯하다.
그녀의 소설작품은 각페이지 각문장들이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또 인생의 깊이가 묻어난다. 가볍게 보면 소리내어 웃고 넘어갈 만한 잔재미인데 더 들어가보면 생의 지혜이자 아포리즘과도 같은 문장들이 넘쳐난다.
<행복은 과장하고 싶은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정답이 나오면 비밀은 없어진다. 나는 그렇게 초라해지고 싶지가 않다. 인생이 살만한 건 정답이 없기 때문인 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있는 문장임에도 마치 노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해서 얻어낸 듯한 느낌을 받게하는, 왜 `박완서`인지 말해주는 문장들이 넘실거린다. 다른 소설책에서 한 두개 발견해내는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정수리에 충격을 줄만한 문장들을 정신없이 따라가서 읽고 있으면 숨이 막히고 긴장되면서도 어느새 그 긴장을 즐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면 소설읽기의 기쁨이 한가득 차오르는 것만 같다.
이번 소설은 왠지 그녀의 전 생애를 조화롭게 갈무리한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 전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몇 가지 것들인 한국전쟁, 일사후퇴, 월남전쟁, 기지촌, 베이비붐 등이 적절하게 버무려지고 어느 것 하나 어색하지 않게 잘 조화되면서 그 시대적 자화상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는 `나`와 내 남편, 시어머니, 친정엄마, 춘희, 그리고 그 남자까지 그 인물들은 지금이라고 책 속에서 나와 살아움직일 것만 같다. 인생에서 제일 가는 것이 무엇일 지에 대해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겠지만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도 여러가지게 있을 수 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더해진 사랑,이성에 대한 사랑까지 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삶의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것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정수는 추억이 아닐는지.
기실 그녀가 <그 남자>와 함께한 시간은 계산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끊임없이 부풀어오르게 하고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던 원천은 <그 남자>였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권태로운 삶에 다채로운 색채를 부여해주고 일상에 젊음을 불러일으킨 그 남자, 그러나 그들의 가까울 듯 멀어질 듯 애매하던 관계는 통속적으로 끝나고 아련함만을 남긴다. 지루한 일상에서 아슬아슬한 모험을 꿈꿨던 `나`의 대담함은 그 남자의 눈 멂으로 끝이 나고 그렇게 그들은 평행선을 그리며 제각기 갈길을 가는 것이 내용의 주이다. 어찌보면 신파적이기 그지없는 내용이지만 줄거리만 보면 통속소설의 그것과도 다를 것이 없지만 원래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개인과는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상, 그리고 주변 사람들, 또 나를 특별함으로 바라봐준(이 소설 속에서는 `구슬`이라고 비유됨) 애틋했던 사람...
어쨌든 이번 박완서의 소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복잡다기했던 사회모습들, 인생에서 상처받은 영혼들, 그러나 이를 딛고 꿋꿋이 뻔뻔하게 살아가는 주변 인물들과 또 진실로 내 마음을 짓무르게 하고 아리게 했던 한 사람의 존재... 그게 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 당시를 기쁨으로 느꼈던 아니었던 간에, 지나가고 나서 그때는 추억하고 `행복`으로 예쁘게 포장하고 기억의 한 군데에 고이 간직해두는 것, 그 행복의 지금의 나를 살게하는 생의 원동력일 수 있는 듯 하다.